티스토리 뷰
목차
목차
- 모나리자
- 어머니
-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16세기 초 바티칸에 나타난 신인 예술가 두 사람이 많은 이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불리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그 주인공입니다. 이들이 점점 두각을 드러내자 또 다른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습니다. 그가 프랑스 왕의 이주 제안을 흔쾌히 수락 한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1516년 마침내 그가 알프스산맥을 넘어 프랑스 왕국에 도착합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작업하던 작품 3점을 가져오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모나리자〉였습니다.
아마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이탈리아 출신의 노동자 페루자는 모나리자를 훔치려 하지 않았겠죠? 1911년 페루자는 조국의 작품을 되돌리겠다는 명분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있던 <모나리자>를 훔쳐 이탈리아로 달아났습니다. 이 사건은 2년 뒤 피렌체의 한 암시장에서 작품이 발견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그사이 엄청난 화제를 낳은 덕에 <모나리자>는 세계최고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유명세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해프닝을 빼고도 <모나리자>를 훌륭한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모나리자>는 <성 안나와 함께 있 는 성 모자상>과 더불어 다빈치가 가장 오랜 시간 공들인 작품입니다.
그는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작품을 수정했습니다. 평소 표정 묘사에 관심이 많았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분명 그는 작품 속 여인의 미소를 표현하는 데 많은 정성을 들였을 것입니다. 당연히 여인의 표정도 여러 차례 바뀌었겠죠? 우리가 <모나리자>의 표정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의미심장한 그녀의 얼굴은 다소 몽환적인 풍경과 만나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비록 미완성에 그친 듯 보이지만 굽이치는 산등성이와 그 사이 어딘가로 흐르는 강줄기의 모습은 여인의 표정이 만들어내는 깊이와 잘 어우러집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다른 초상화와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빈치 시대에 그린 초상화를 보면 배경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모나리자>에는 배경이 등장해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키려 합니다. 굳이 배경을 그린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느낀 대로, 그림 속 여인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기 위해서였을까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직까지 여인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것도 다빈치의 의도일 수 있습니다. 그는 본래 이 초상화를 피렌체에 살던 리자 부인‘이탈리아어로 Mona Lisa’에게 바치려 했습니다. 그녀는 자식을 여의고 상을 치르고 있었다는데 실제 그녀가 썼을 것으로 추정하는 검은 베일이 작품 속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정말 '리자 부인'을 그린 것이라면 다빈치는 왜 이 작품을 그녀에게 넘기지 않고 끝까지 갖고 있었을까요? 이러한 이유로 주인공의 정체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채 추측만 난무하는 상황입니다.
어머니
〈모나리자〉는 다빈치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갖고 있던 작품이라 그와 엮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그의 어머니의 모습일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어머니의 모습은 그에게 가장 그리운 대상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앞서 소개한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을 보면 어떤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따뜻한 모성애가 느껴집니다. <모나리자〉에서는 어떤 부분이 그의 어머니와 닮아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확실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인을 그의 어머니의 모습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정체가 불분명해도 다빈치가 가장 아끼던 여인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500년이 지난 지금 〈모나리자〉는 다빈치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아끼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과연 다빈치는 하늘에서 이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4월 15일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의 작은 마을 빈치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피렌체의 대표적인 예술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업실에서 초기 예술 교육을 받았습니다. 베로키오의 지도 하에 그는 화가, 조각가, 제도가로서의 기술을 연마하여 빠르게 주목할만한 재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레오나르도는 과학, 공학, 해부학 및 기타 다양한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482년에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이주하여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궁정 예술가이자 기술자로 일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자신의 관점과 구성에 대한 숙달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프레스코화인 "최후의 만찬"을 포함하여 그의 가장 상징적인 작품 중 일부를 만든 것은 밀라노에 있는 동안이었습니다.
예술적 노력 외에도 레오나르도는 해부학, 식물학, 공학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 획기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스케치와 도표, 관찰 내용으로 가득 찬 그의 노트에서는 그의 끝없는 호기심과 혁신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말년을 프랑스에서 보냈고 그곳에서 프란시스 1세 왕의 궁정에 초대되었습니다. 노령과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1519년 5월 2일 사망할 때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