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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젤 앞에서의 자화상
    • 인공조명
    • 렘브란트 판 레인

    렘브란트 판 레인 <이젤 앞에서의 자화상>1660년

     

    이젤 앞에서의 자화상

    <이젤 앞에서의 자화상》Porrait de lartste au cheralcr은 그의 쉰네 살 때 모습으로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고 힘겹게 하루를 버티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네덜란드 외과 의사들의 의뢰로 완성한 작품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일약 대스타로 등극했습니다. 많은 이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나날이 성장했고, 이듬해에는 사랑하는 여인 사스키아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도 하죠. 하지만 날개를 달자 하늘 무서운 줄 모른 채 너무 올라갔던 것일까요? 의뢰자들의 요구와 시대의 흐름을 무시한 채 자신만의 화풍을 고집하던 그의 내리막길이 시작됩니다. 그 계기가 된 작품이 바로 우리에게 흔히 '야경꾼'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프란스 반닝 코크와 빌럼 판 라위텐뷔르흐의 민병대〉입니다.
    이 그림을 의뢰한 민병대원들은 힘과 기개 넘치는 모습으로 나아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바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림의 구성은 무질서하며 어수선했고, 큰돈을 지불한 자신들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데 정체 모를 꼬마 아이가 그림 가운데에서 가장 밝은 빛으로 표현되어 있었죠. 그림을 본 그들은 매우 분노했습니다.

     

    인공조명

    렘브란트는 그림을 그릴 때 다른 화가들과 다르게 자연 조명이 아닌 그림 속 필요한 부분에 인공조명을 적절히 배치해 사용했습니다. 중심인물만 강조하고 필요 없는 부분은 생략하거나 어둠 속으로 감춘 것입니다.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덕에 빛이 형태를 표현하는 수단을 넘어 영혼을 담아내는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혁신적이라고 말하지만 당시에는 안타갈게도 현저하게 외면받은 시도였죠. 명성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외중에 아내 사스키아와 두 딸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그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큰 시련의 구렁텅이로 떨어집니다. 삶은 더욱더 궁핍해졌고, 불어난 빛으로 인해 결국 법원에 파산 신청까지 하게 되죠. 그동안 그가 수집한 작품들은 물론 그의 집도 경매에 넘어갔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담대히 그려냅니다.
    그림 속 그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왼손에는 팔레트, 오른손에는 긴 붓 을 들고 캔버스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닥치면 최대한 자신을 포장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표현했습니다. 빛은 왼쪽 위에서 내려와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습니다. 생기 있는 눈동자와 미소는 "그래도 난 아직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비추던 밝은 빛은 이내 사방이 로 흩어져 어둠으로 변합니다. 마치 점점 어둠에 잠식되어 가는 자신의 처절한 인생을 자화상 속에 모두 담아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참 이기적이게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고흐도 렘브란트를 좋아했고 그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거의 두 화가를 통해 위로를 얻는 것처럼, 고흐도 렘브란트에게 위안을 얻지 않았을까요? 이런 나도 버텼는데, 너라고 왜 하지 못하겠느냐?라는 위안 말이죠.
    렘브란트가 젊은 날에 그린 자화상은 이 작품과 많이 다릅니다. 고 급스런 옷과 금장식, 화려한 모자로 자신을 한껏 치장했고, 무서울 것 없다는 다소 우쭐한 표정과 포즈에서는 자신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평생 동안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긴 렘브란트, 그의 인생을 다른 자화상들과 함께 만나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렘브란트 판 레인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방앗간 주인의 아홉 번째 자녀였으며 그의 가족은 비교적 부유했습니다.  렘브란트는 예술을하기전  레이덴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는 암스테르담의 Pieter Lastman을 포함하여 몇몇 화가 밑에서 견습생을 보냈습니다.  렘브란트의 스타일은 빛과 그림자(키아로스쿠로)의 극적인 사용과 심리적 깊이가 특징입니다. 그는 특히 초상화와 성경 속 장면에서 인간의 감정과 성격을 묘사하는 데 능숙했습니다.

    렘브란트의 말년은 개인적 비극과 직업적 좌절로 얼룩졌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느슨한 붓놀림과 전통적인 예술적 관습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습니다.

    렘브란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야경꾼",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 "탕자의 귀환" 등이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1669년 10월 4일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Westerkerk 교회 마당의 표시가 없는 무덤에 묻혔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예술가로서의 명성은 그가 죽은 후에야 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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