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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엉겅퀴를 든 자화상
    • 프러포즈
    • 알브레히트 뒤러

     

    알브레히트 뒤러 <엉겅뤼를 든 자화상>

    엉겅퀴를 든 자화상

    붉은 모자를 쓰고 간결하면서 세련된 옷을 걸친 잘생긴 한 남자가 있습니다. 손에 엉겅퀴를 들고 몸을 4분의 3 정도 비튼 채 관람자를 매 혹적으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짙은 검은색 배경은 외모를 돋보이게 하네요. 그가 여러분에게 말을 건넵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엉겅퀴를 든 자화상〉Portrait de lartiste tenane un chardon은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e Direr, 1471~1528가 스물두 살 때 스트라스부르 Strasbourg를 여행하며 그린 자화상입니다. 여행 중이니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면 좋을 텐데 자화상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뒤러는 여행 도중 아버지가 그의 약혼을 성사시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정략결혼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면식도 없는 두 남녀가 갑자기 부부가 되었죠.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얼굴도 모른 채 부부가 된 둘은 서로에 대한 기대감과 불안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뒤러는 약혼자 아그네스 프레이를 배려한 듯 잠시 여행을 멈추고 자신의 모습을 직접 그려 그녀에 게 보냈습니다. 한마디로 프러포즈를 위한 자화상이었던 것이죠.

    초상화와 자화상은 고인이 된 사람을 현재로 불러내는 역할만이 아니라 그들을 살아 있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차이 점이 하나 있죠. 초상화는 화가가 다른 사람을 그린 것이고, 자화 상은 화가 자신을 그린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자화상에서는 등장인물의 외면뿐 아니라 내면까지도 깊게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뒤러는 자신의 이미지에 매료된 최초의 예술가로 자화상을 여러 차례 그리면서 그림의 한 장르로 정착시켰습니다. 그래서 〈엉 겅퀴를 든 자화상>이 최초의 독립 자화상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 고 있죠. 끊임없는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작품 세계를 넓혀간 뒤러 가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는지를 생각하며 작품을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프러포즈 

    그런데 아름다운 장미나 화려한 꽃이 아니라 메말라 보이고 뾰족뾰족한 풀을 들고 있습니다. 엉겅퀴 혹은 에린지움이란 식물로 이것이 남자의 정절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면류관, 즉 수난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뒤러는 독일 뉘른베르크의 금세공사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소묘에 대한 천재성을 보였고, 베네치아로 여러 차례 여 행을 다녀오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입니다.
    그는 특히 이탈리아 화가의 사회적 위치를 부러워했습니다. 당시 독일 화가들은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고, 식견이 높지 않은 돈 많은 상인들이나 지방 귀족들을 위해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항상 많은 시비가 붙어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았습니다. 이탈리아 화가들이 재력가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거침없이 작품 활동을 해나가는 모습에 그는 자괴감이 들었죠. 그래서 그는 화가로서 더욱 강한 소명감을 가지고 활동을 해나갑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화가라는 직업적 소명감이 장인을 넘어 거묵한 성직자의 사명과 같다고 생각, 자신의 이미지를 신의 모습에 투영해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스물여덟 살에 그린 자화상을 보면 자신을 마치 예수의 모습처럼 그린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도 역시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엉겅퀴가 등장하며, 그림 상단에는 그림을 그린 연도 1493년과 더불어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8 9 3 Wis es ben falenr "나의 일은 위에서 (신께서) 정한다."
    (My sach die gat / als es oben schtat)
    그가 얼마나 강한 소명감을 지녔는지 이 한 문장에서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약혼 소식을 들은 뒤러가 자신의 뜻이 아닌 집(위)에서 정해준 대로 결혼해야 하는 복잡한 심정을 나타낸 것 아니냐는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어떤 마음을 담아 자화상을 그렸는지는 오직 화가 뒤러만이 알고 있겠지요.

     

    알브레히트 뒤러

    알브레히트 뒤러는 화가, 판화 제작자, 독일 르네상스 이론가였습니다.  뒤러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으며 금세공사인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뒤러는 뉘른베르크에서 화가 미하엘 볼게무트(Michael Wolgemut)의 견습생으로 정식 예술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또한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다양한 예술적 영향을 흡수했습니다. 뒤러는 회화, 판화, 소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다재다능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 "멜렌콜리아 I", "묵시록의 네 기사"와 같은 상징적인 작품을 포함하는 목판화와 판화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뒤러의 판화는 그의 작품을 대중화하고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뒤러는 판화 기술, 특히 조각과 목판화 사용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매우 상세하고 복잡한 인쇄물을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여 선, 질감 및 구성에 대한 숙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기술 혁신은 유럽 판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뒤러는 예술 작품 외에도 다작의 작가이자 이론가였습니다. 그는 예술과 과학의 교차점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하는 원근법, 기하학, 비율과 같은 주제에 관한 여러 논문을 저술했습니다.  뒤러의 영향력은 수학을 포함한 다른 분야로도 확장되었으며, 비율과 원근법에 대한 그의 연구는 시각적 표현에 대한 이해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전반적으로 알브레히트 뒤러는 예술에 대한 공헌과 유럽 문화에 대한 영향력으로 인해 그를 서양 미술사의 중심인물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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