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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 바이런의 산문시
    • 외젠 들라크루아

    외젠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7년

     

    사르나다팔루스의 죽음

    종교나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에서 주인공이 신의 구원을 받으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옛날 사람들이 신의 구원을 간절히 바랐다는 뜻이겠죠? 만약 구원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주인공은 분명 슬프고 쓸쓸한 결말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두고 '비극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비극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죠? 바로 영국 최고의 작가로 꼽히는 셰익스피어 Wiliam Shakespear입니다. 그는 오늘날 4대 비극이라 부르는 작품들을 내놓으면서 인간의 이야기가 얼마나 큰 울림을 줄 수 있는지를 증명했습니다. 이런 그의 작품이 어느 날 영국을 찾은 한 프랑스화가의 눈에 들어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 Eugenc Delacroix, 1798~186319세기 초에 탄생한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통해 고향에서 유행하던 영웅들의 이야기에서는 만나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감동을 경험합니다. 또한 그는 영국의 젊은 화가들을 만나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아련하고 때로는 강렬한 색채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는 윤곽선을 이용해 인체의 아름다움을 내세우던 프랑스 화가들의 방식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바이런의 산문시

    그가 1828년에 공개한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La Mort de Sardanar pale은 영국의 영향이 아주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그림 속 등장 인물들은 언뜻 보면 전부 따로 노는 것 같지만, 강렬한 붉은빛과 화사 한 노란빛에 둘러싸인 채 일관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이 몽환적인 분위기는 그림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일어나는 잔혹한 이야기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영국 출신의 작가 바이런 George Gordon Byron,1788-1824의 산문시인 '사르다나팔루스'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1827년에 완성된 들라크루아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그의 낭만주의 감성을 보여주는 놀라운 예입니다.

    이 그림은 전설적인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루스(Sardanapalus)가 제국이 멸망하는 동안 그의 소유물과 첩들에게 둘러싸여 자살을 준비하면서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들라크루아의 드라마틱한 색상 사용, 역동적인 구성, 정서적 강렬함은 이국주의, 폭력, 숭고함에 대한 낭만주의적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몽환적인 분위기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꿈이길 바라는 왕의 소망을 나타내려 한 것일까요? 어쩌면 화가가 시를 읽고 받은 강한 인상을 그림 속에 표현한 것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중적인 설정은 그림의 분위기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앙에서 유독 밝게 빛나는 나체의 여인들은 이 그림이 과연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인지, 인체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인지 헷갈리게 만듭니다. 정작 그림의 제목은 사르다나 팔루스의 죽음>인데도 말이죠. 주인공인 왕을 제쳐두고 이렇게 여인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화가도 어쩔 수 없는 19세기 부르주아 남성이었기 때문일까요?

    이와 같은 모호함으로 인해 작품은 공개되자마자 비평가들의 따가운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림을 다시 배워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까지 들을 정도였다니 화가로서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요?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이 작품을 통해 비로소 그림에 감정을 싣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프랑스 회화의 정석으로 여겨지던 '' 의 아름다움이 아닌 ''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말입니다.

     

    외젠 들라크루아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거장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는 1798년 4월 26일 프랑스 샤랑통생모리스(Charenton-Saint-Maurice)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예술적 재능은 일찍부터 인정받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서 저명한 신고전주의 화가인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Pierre-Narcisse Guérin)의 지도를 받으며 정규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들라크루아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빠르게 발전시켰고, 이는 나중에 낭만주의 운동과 연관되게 되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경력은 예술적 혁신에 대한 헌신과 전통적인 관습에 도전하려는 의지로 특징 지워졌습니다. 그는 문학, 신화, 역사를 포함한 다양한 출처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그의 작품은 종종 열정, 영웅주의, 인간의 고통에 대한 주제를 연구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회화에 능숙했을 뿐만 아니라 숙련된 초안가이자 판화 제작자였으며 그의 영향력은 캔버스를 넘어 확장되었습니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아폴로 갤러리의 상징적인 천장을 포함하여 공공건물에 대한 여러 기념비적인 의뢰를 수행하면서 프랑스 벽화의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평생 동안 그 시대의 문화적, 정치적 흐름에 적극적이였습니다. 그는 빅토르 위고, 조르주 상드 같은 작가들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19세기 유럽 전역을 휩쓴 혁명 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낭만주의 시대의 뛰어난 예술가 중 한 명인 들라크루아의 유산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형태와 색채에 대한 그의 대담한 실험은 현대 미술 발전의 초석을 놓았고, 그의 영향력은 인상파와 상징파를 포함한 다음 세대의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1863년 8월 13일에 세상을 떠났고,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청중을 사로잡고 영감을 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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