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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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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스를 뜨는 여인
- 카메라 옵스큐라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레이스를 뜨는 여인
우리는 크고 작은 소음들로 시끄러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고요함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따스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림 속 고요함은 어떤 것일까요? 여기 고요함을 넘어 숨 막힐 듯한 순간을 그려낸 화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입니다. 그가 그린 〈레이스를 뜨는 여인〉A Deniclitre을 볼까요?
한 뼘 정도의 캔버스 속에서 한 여인이 바느질을 하고 있습니다.
꽉 조여진 화면 구성과 단순한 배경은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근경에는 녹색 테이블보와 그 위로 흰색 실과 붉은색 실들이 늘어져 있습니다. 네덜란드는 예부터 영국에서 수입한 양모를 이용해 레이스를 생산하는 산업이 많이 발전했습니다. 따라서 17세기 네덜란드 여성들의 주된 일 중 하나가 바로 레이스를 뜨는 일이었습니다. 판 위에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핀을 촘촘히 박은 뒤 보빈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그 사이로 실을 엮어가며 만드는 레이스는 예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레이스를 짜는 여인들의 모습은 당시 네덜란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좋은 주제로 많은 화가가 그렸죠.
작품을 다시 보면, 그녀는 손에 보빈들을 들고 자수들에 몸을 살 짝 기울여 레이스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햇빛을 받은 그녀의 손과 노란색 옷은 주변의 어두운 사물들, 그림자가 살짝 드리워진 얼굴과 색의 대조를 이루며 더욱 빛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녀의 세심한 손동작에 주의를 더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그녀가 일하는 데 방해될까 보는이들은 숨을 죽인 채 그저 바라보게 되죠. 마치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 영원히 정지된 한 곳에 그녀는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작은 캔버스 속에 이렇게 밀도 있는 그림을 그려냈다니 참 대단하지 않나요? 19세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르누아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말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카메라 옵스큐라
페르메이르가 이렇게 그릴 수 있었던 이유로 '카메라 옵스큐라 canen ohscan 라는 도구가 언급되기도 합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카메라의 기본 원리입니다. 빛이 전혀 없는 어두운 공간 한쪽 면에 바늘만 한 작은 구멍을 내면, 구멍을 통해 보이는 모습이 빛과 함께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와 상이 거꾸로 맺힙니다. 구멍이 커질수록 상은 흐려지고, 작아질수록 상이 선명해지죠. 이것이 카메라의 조리개 역할인 셈입니다. 좀 더 사실적인 묘사가 요구되던 시대에 사물에 더 가깝게 접근하기 위한 연구 과정에서 얻은 결과로, 페르메이르의 작은 화폭 속 사실적인 묘사는 아마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해서 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루브르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 사실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에 대해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죠.
그는 델프트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 살며 그림을 그렸고, 현재 40여 점이 안 되는 작품이 남겨져 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이렇듯 그의 작품은 감춰진 삶의 이야기까지 더해 지면서 더욱 신비롭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현대의 삶 속에서 그의 작은 그림 한 점을 만나며, 잠시 고요함이 주는 여유와 위로를 느껴보면 좋겠습니다.
루브르에서 실제 이 그림을 본 이들은 눈에 띄는 것은 작은 그림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작품을 여러번 감싸고 있는 액자 틀에도 자연스레 시선이 향하게 되기 때문이랍니다
큰 액자 안에 또 다른 액자가 있는 듯한 구성은 우리를 그림 속으 로 천천히 더 빨려 들어가게 만들며, 마치 어두운 공간에서 카메라 옵스큐라의 조그만 구멍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고 합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632년에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페르메이르 는 어릴 때부터 예술에 대한 애착을 보였습니다.
지역 화가 레오나르트 브라머(Leonaert Bramer)의 지도 하에 그는 자신의 기술을 연마하고 나중에 자신의 작품을 차별화할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그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페르메이르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는 당시 예술가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곤경이었습니다.
페르메이르 가 부유한 가톨릭 가문의 딸인 카타리나 볼네스와 결혼한 후에야 그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카타리나의 지참금은 그에게 안정적인 수입을 제공하여 전적으로 예술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 안정성은 페르메이르 의 예술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세부 사항에 대한 절묘한 관심, 빛의 세심한 사용, 심오한 평온함이 특징입니다. 그의 그림은 종종 친밀감이 스며드는 가정의 풍경을 묘사하며 우리를 일상의 조용한 아름다움으로 초대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매혹적인 사실주의로 젊은 여성의 수수께끼 같은 시선을 사로잡으며 그의 빛과 표현 능력을 잘 보여줍니다.
그의 부인할 수 없는 재능에도 불구하고 페르메이르의 경력은 무명으로 얼룩졌습니다. 렘브란트나 루벤스와 같은 동시대 사람들과 달리 페르메이르는 평생 동안 널리 알려진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그림은 대부분 델프트에서만 국한되어 있었고, 선택된 소수의 추종자들에게만 알려져 있었습니다.
비극적으로, 페르메이르의 삶은 43세의 나이로 단축되었고, 수세기 후에야 제대로 평가되게 됩니다. 19세기가 되어서야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르네상스를 맞았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그의 그림을 재발견하고 옹호한 프랑스 미술 평론가 테오필 토레-뷔르거(Théophile Thoré-Burger)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오늘날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는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거장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과 인간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비록 그는 생애 동안 그림자 속에 살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그림은 계속해서 밝게 빛나며 전 세계 예술 애호가들의 마음과 정신을 밝게 비춰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