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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의 죽음
- 자유
-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욕조 안 물은 이미 빨갛게 물들었 고, 바닥에는 가느다란 단검이 떨어져 있습니다. 남자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 확실합니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으며, 화가는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요?
오늘날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마라의 죽음〉La mor de Marat 원작 은 1793년에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 jcgues Lous Dasid, 1748-1835가 그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림을 더욱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제자들에게도 모사작을 그리게 했고, 원작을 포함해 총 5점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사작도 이때 탄생한 작품입니다. 각각의 작품은 명암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비슷합니다. 다른 점이라면 나무상자에 새긴 글귀입니다. 루브르의 모사작은 "나를 매수하려 했던 그들이 살인을 저질렀다"Nayaint pu me corompre, Jle miont asiassine라는 문장으로 사건의 정황을 알립니다. 화가는 이 작품을 통해 '마라'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장 폴 마라 Jean-Paul Marat, 1743-1793는 화가의 절친한 친구이자 프랑스혁명 이후 혁명군의 '스피커'를 자처했던 기자 출신 정치인입니다.
그는 자신이 발행한 신문 <민중의 벗>을 통해 반대 세력의 정체를 고 발하는 일명 '데스 노트'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이 신문에 오르 내린 이름들은 곧장 단두대로 끌려가 처형을 당할 정도로 그의 깃펜이 가진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정적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해인 1793년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 네트가 처형당한 해입니다. 마라는 이 사건과 함께 벌어진 학살극을 정당화하는 글을 〈민중의 벗>에 기고하면서 많은 이의 원성을 듣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온건파 소속의 코르데이라는 젊은 여성에게 그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정세를 뒤바꾸진 못했고, 결국 그를 추모하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마라의 죽음>이 탄생한 것입니다.
자유
마라의 죽음은 분명 다비드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다비드는 이 사건을 두고 "진실한 애국자의 죽음"이라 평가할 정도로 큰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안타까움이 반영된 것인 지 〈마라의 죽음>에서 마라는 <민중의 벗> 이상의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한 주인공의 편안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가톨릭 성화에 등장하는 성인의 순교 장면이 떠오릅니다. 과연 그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택한 것일까요?? 다비드의 말을 빌리면,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자유입니다..
따라서 그가 손에 쥔 펜과 종이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무기입니다. 비록 이 무기가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지라도 자유를 위한 일이라면 모든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비드는 신고전주의 화가답게 고전에서 아이디어를 빌려 마라를 혁명의 순교자로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는 다비드의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입니다. 그는 옛날 방식을 이용해 오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비슷한 시기에 내놓은 작품인 <테니스코트의 서약>도 <아테네 학당> 같은 라파엘로의 작품과 비교되곤 합니다. 덕분에 혁명기의 일화를 다루는 그의 작품을 보면 신화나 성경 속 이야기를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과연 다비드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겐 어떻게 보였을까요?
자크 루이 다비드
프랑스 신고전주의 운동의 저명한 인물인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는 18세기말과 19세기 초의 격동적인 사건들과 복잡하게 얽힌 삶을 살았습니다. 1748년 8월 30일 파리에서 태어난 다비드는 어려서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화가 Joseph-Marie Vien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화가로서 다비드의 경력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까지 몇 년 동안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계몽주의의 이상과 프랑스에서 점점 커지는 혁명적 열정을 반영하면서 고전 역사와 신화의 장면을 자주 묘사했습니다.
1793년에 완성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마라의 죽음"은 혁명 지도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장 폴 마라가 욕조에서 암살되는 극적인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순교를 강력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마라가 가해자 샤를로트 코르데의 편지를 들고 평화로운 죽음의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혁명 기간 동안 다비드는 급진적인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인물들과 협력했습니다. 그는 급진적인 자코뱅 클럽의 회원이었으며 심지어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데이비드의 정치 참여는 그의 예술 경력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혁명적 이상과 인물을 미화하는 선전 작품을 제작하면서 프랑스 혁명 정부의 주요 화가가 되었습니다. "호라티우스의 맹세"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같은 그의 작품은 혁명 정신의 상징적인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몰락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부상으로 다비드의 운명은 바뀌었습니다. 혁명 운동과의 긴밀한 유대에도 불구하고 다비드는 새로운 정치적 환경에 적응하여 나폴레옹의 공식 궁정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황제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나폴레옹의 대관식, 알프스를 넘는 장면 등 그의 통치의 중요한 순간들을 묘사했습니다.
1815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다비드는 브뤼셀로 망명하여 1825년 12월 29일 사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