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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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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초 만드는 사람들의 휴식
- 공화정 정부
- 농촌에서 성장
건초 만드는 사람들의 휴식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에서 순수한 에너지가 나온다
농부들의 휴식이 그려진 조금은 어두운 그림이 여기 있다. 부드러운 색감과 선, 그리고 아련한 분위기를 보면 한국에서 특히 인기 있는 대표적인 농민화가의 이름이 절로 떠오른다. 그 이름은 장 프랑수아 밀레 Jean Francois Millet), 그리고 이 그림은 「건초 만드는 사람들의 휴식」이다.
밀레라는 이름은 농민화가 한 명에 그치지 않고 농촌의 생활과 풍경을 그린 그림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시골 마을 바르비종에서 평생 농촌의 삶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 온 그는 소박하고 진실한 모습을 담아냈다는 평과 함께 무한한 애정을 받는다.
그런데 밀레에 대해 우리는 뭘 알고 있을까?
1848년 제2 공화국의 출현은 화가 프랑수아 밀레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였다. 공화국 탄생 초기, 열렬한 애국심에 고취된국립 미술학교 구성원들의 찬사와 소개에 힘입어 내무부 장관이던 사회당의 레드뤼 롤랑은 밀레의 「키질하는 사람』을 구입한다. 1848년 살롱에 나와 이미 찬사를 들은 바 있는 그림이었다. 이후 유명인사 들이 밀레의 그림을 구입하거나 국가 지정 장소에 전시되는 일들이 이어졌다.
「건초 만드는 사람들의 휴식」이 발표된 해인 1848년은 프랑스 역사의 중요 사건이 많던 때이다. 전세기 말 프랑스 혁명에 뒤이은 나폴레옹 시대가 프랑스의 패배로 마무리되고, 이후 국가 권력을 되찾은 귀족들은 모든 것을 예전대로 돌려놓으려 했다. 당연하게도 이 시도는 국민 저항을 불렀고 복고 왕정 부르봉 2기는2 얼마 안 가 다시 무너진다. 프랑스가 이 전환기에 입헌군주제를 선택했던 것은 대중의 지지를 받아 시민의 왕이라고 불린 루이 필리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이 필리프 왕의 입헌군주제 정부가 들어선 것이 18년 전, 하지만 그마저도 강압적인 통치를 시도하다 실각하며, 1848년을 끝으로 프랑스는 공화정 체제로 넘어가 다시는 왕을 섬기지 않게 된다. 짧은 공화정 체제 이후 독재자이자 황제인 나폴레옹 3세가 나타나지만 왕이라는 칭호가 붙은 것은 루이 필리프가 마지막이다.)
공화정 정부
새로 들어선 공화정 정부는, 그렇지만 시작부터 불안한 정치 환경에 놓여 있었다. 아직도 이전 체제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새로운 정치 실험은 그 목적을 정하는 것도 버거웠다. 그러니 일반 국민의 지지가 더욱 필요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농민들의 생활을 숭고하고 평화롭게, 또 진실하게 그린다는 평가를 받은 밀레의 작품은 여전히 국민 대다수가 농민이던 프랑스의 지형도로 봤을 때 선전 효과가 클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내무부 장관 이 그림을 구매하고, 국가가 주관하는 주문들이 몰리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전통적으로 역사화에 국한되던 국가 주문을 농민을 그린 그림으로 바꾼 것은 공화파의 새로운 시도였던 셈인데, 의도야 어땠든 밀레는 삽시간에 프랑스 국민이 좋아하는 화가로 올라서게 되었다.
오르세미술관은 이렇게 설명한다.
밀레의 작품 첫 구매 이후, 프랑스 정부는 공식적으로 밀레에게 국가가 구입할 그림을 주문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그에게 큰 영광이자 그를 유명하게 한 계기이기도 했다. 이 주문에 맞춘 그림이 바로 이 「건초 만드는 사람들의 휴식」이다. 밀레는 이 그림에 종교적인 수준의 경건함과 평화로움을 담으려고 시도했다. 주문 완료 후 국가가 지급한 1800프랑으로 밀레는 바르비종으로 이사 가서 정착할 수 있었다. 알려진 대로 밀레는 이 마을에 정착해 꾸준히 자신의 스타일을 표명했고, 사망할 때까지 거기 살았다. 내무부 장관의 작품 구매와 이후 국가 주문 그림을 완성한 것, 거기서 생긴 돈이 파리에서 어렵게 주문 그림을 그리던 밀레에게 파 리를 떠나 원대로 농촌에 정착하도록, 그리고 이주 초기 어려운 시절을 견딜 수 있도록 힘을 줬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가게 된 바르비종이라는 마을은 파리에서 기차로 한 시간가량,, 밀레 이전에도 이 미 여러 화가들의 목가적인 작업 배경이 되어 온, 농촌이라지만 이미 유명한 곳이었다.
그림의 제재는 이제 종교에서 벗어나 좀 더 세속적인 주제를 택했지만,, 밀레는 성경에 나올 법한 구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언뜻 종교화로 보이는 표현을 선택했다. 「키질하는 사람』에 이어 동시대 농촌 풍경이라는 주제를 유지했으며, 그림에 보이는 인물들은 목가적이고 평화롭기만 하다.
농촌에서 성장
밀레는 어린 시절 농촌에서 성장해 농민의 생활에 친숙했다.
이 그림에는 힘든 일을 하고 나서 건초 더미 그늘 아래 쉬는 건초 만드는 사람들의 달콤한 휴식이 그려져 있다. 숨소리만 들릴 것 같은 이 조용한 사람들의 무리 끝 물을 마셔 갈증을 푸는 여성 뒤로 마치 메아리처럼 원경에서 역시 한가롭게 강에서 목을 축이는 소 떼의 모습은, 동물이나 사람이 모두 농촌의 리듬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설명처럼 보인다.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평화로워 보인다 해도 이 일이 얼마나 고될 것인지 짐작할 수 있기에, 그리고 이들이 노동에 비해 그리 넉넉하지 못한 임금을 받을 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 그림을 마냥 평화롭게 볼 수만은 없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언론들은 이 그림들이 평화롭고 누구나 다 꿈꾸는 농촌의 일상이라는 선전을 곁들였다. 그것은 체제의 안정에도 필요하고 계급 갈등을 완화하는 데도 필요했던 일이니 다분히 정치적인 행위였다. 밀레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농촌에서 살아가는 농부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밀레의 이러한 주제는 그 뒤로도 꾸준히 이어졌다. 그중에는 1866년에 그린 「정오 의 휴식」이라는 파스텔 그림도 있는데, 밀레를 진심으로 존경한 반고흐가 1889년 「정오의 휴식」이라는 같은 제목으로 같은 구도의 그림을 그려 두 작품이 모두 오르세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서양 미술사를 놓고 보면, 벨기에 네덜란드 위쪽의 장르화가 아닌 이상 이렇게 농부들의 삶이 주연으로 등장한 것은 꽤 새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그렇다곤 하지만, 밀레의 그림에는 순수한 에너지가 존재한다. 그 에너지 속에 삶에 대한 애착과 진지함이 담겨 있다. 선배 화가들 중에서도 밀레를 가장 존경한 빈센트 반 고흐가 밀레의 그림에 대한 오마주를 여러 차례 한 것도 그 진지함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