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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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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인의 타락
- 신고전주의 예술과 그 특징
- 시대적 배경
로마인의 타락
미술관을 방문할 때, 처음 들어서면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고민하게 된다. 오르세미술관처럼 크고 넓은 공간이라면 더 그렇다. 하지만 그 공간 속에서 우리를 반기는 건 한 편의 거대한 그림이다. 토마 쿠튀르의 「로마인의 타락」이 그중 하나이다.
이 그림은 1847년에 탄생한 작품으로, 신고전주의 예술의 상징이 되었다. 신고전주의는 프랑스혁명 후에 등장한 예술 운동으로, 로코코 양식을 비난하고 고전적인 주제와 스타일로 돌아가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 그림은 그런 예술적 담론을 현실화시키는 증거 중 하나죠.
그러나 이 그림이 다시 주목받은 것은 오르세미술관에서 재전시되었을 때입니다. 수십 년 동안 무시되어 왔던 신고전주의 작품이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큰 충격이었다. 이는 예술의 역사와 문화의 변화를 생각하게 한다.
그림을 보면, 한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밀히 들여다보면 각 인물과 장면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19세기 중반의 예술 양식을 따르면서도 혁신을 시도한 작품으로,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죠.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예술이 담아낸 시대의 메시지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술이 단순한 감상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신고전주의 예술과 그 특징
신고전주의란 프랑스혁명 이후, 앙시 레짐 즉 그 전의 문화인 베르사유 세대에 유행한 로코코 양식을 비난하면서 등장한 나름대로 혁신을 주장한 예술 운동이다. 로코코 예술을 귀족들의 퇴폐적인 향락에 순응하는 예술로 규정한 자크 루이 다비드가 이를 대표한다. 다비드는 서양 문명의 영원한 고전인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형미를 기본으로 삼아 다시 정돈되고 엄숙한 예술의 정신으로 회귀하자면서 그 운동을 신고전주의라고 명명했다.
고전에 기초한다는 뜻으로 이름도 '신고전주의'라고 지었던 이 운동 때문에, 프랑스혁명 이후 갑자기 그리스 로마 등의 고대 역사와 신화가 자주 예술에서 다뤄졌다. 클래식에 또다시 생명 유지 장치가 연결된 것 같은 이런 분위기는 이후 인상주의 등의 모더니즘 예술과 경쟁에서 고루하다는 평가를 받고 20세기에 들어서며 점차 사라지는 운명을 맞는다.
그나마 다비드와 그 제자들은 이 폭풍을 견뎠지만, 1860년대 이후에 그려진 신고전주의 그림은 말 그대로 수구주의로 취급되고 무시되기까지 했다. 20세기 초반에는 관람객들까지 반발해, 신고전주의 양식의 예술품들은 벽에서 떼어졌고 차마 버리지는 못해 박물관 창고로 직행했다. 그랬는데 1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신고전주의에 전형적인 이 큰 그림을 다시 빼내 새로 지은 미술관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장소에 전시한다는 것은 큰 뉴스였다.
이 그림의 재등장이라는 사건을 통해 우리는 작품이 탄생했던 당초의 분위기와 의미를 읽을 수 있고, 무시당하다 재발견되기에 이른 과정을 통해 문화의 변화도 생각할 수 있다.
가로 7.7미터, 세로 4.7미터인 이 대형그림은 전형적인 공식 주문 그림의 형태를 띤다. 그림의 내용이나 형식에 그 어떤 혁신이나 변화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전통을 기반으로 한 재현에 집중한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퐁피에, 즉 '소방관 예술이라는 별명으로 조롱을 받았다. 이것은 19세기 프랑스 소방관의 헬멧이 반짝이는 금속제이며 형태도 그리스 병사들의 투구를 연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신고전주의 그림들이 항상 그리스 로마 고전에서 주제를 가져오다 보니 인물들이 투구를 쓰고 있는 경우가 잦아, 그런 복장의 사람들만 그려 대는 화가들을 조롱하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국립 미술학교 학생들이 교과에 포함된 주제들을 가지고 "항상 소방관, 또 소방관"이라고 노래를 부르며 자조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오르세의 의도는 「로마인의 타락』 같은 작품들이 고흐나 피카소가 활동하던 시기까지도 계속 생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줌으로써 그 이질감, 혹은 낯설었던 환경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데 있다.
시대적 배경
그림을 보자.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 정신없어 보이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 그림은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 장면을 오차 없이 정리해 놓고 있다.
구성 면에서는 19세기 중반 유행한 절충주의 형식을 따르는데, 베로네제의 고대 건축 지식에서 영향받았음에 틀림없는 건물 묘사, 그리고 그 시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던 들라크루아의 표현법과 미켈란젤로식 인체표현기법 등이 혼합되어 있다. 그림을 연출하는 방법에서 쿠튀르가 당시에 유행한 모든 것을 조합해 절충했다는 것은, 무게의 중심이 전통을 지키는 것에 있다고 해도 균형을 잡아야 했던 작가의 선택일 것이다.
도드라져 보이는 기둥들 아랫사람들은 술에 취해 난잡한 축제를 벌이는 것으로 묘사된다. 오른쪽에 서 있는 젊은 남자 두 명은 로마의 시인들인데, 이 상황을 걱정을 담아 비판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를 뛰어넘어 19세기의 세태 비판으로 연결된다. 이 그림이 국가의 주문으로 그려졌고, 살롱 대상 이후 바로 국가가 매입했다는 점은 그림이 어떤 것을 보여 주고 싶어 했느냐의 문제다. 이 그림을 주문한 국가는 무슨 생각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보다 이 그림은 정치적으로, 또 정서적으로도 1847년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기술의 발전과 경제적인 풍요가 가져오는 변화가 지금까지의 전통과 문명을 붕괴시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 계급 간의 불균형으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혁명의 예고 등 을 내포한 사회의 공기가 로마의 난교와 쇠락이라는 주제에 담겨 표현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국가의 숨겨진 의도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그림을 그렇게 선망하고 원했던 19세기인들의 생각이다. 그들에게 전통을 지키고 질서를 따르는 것은 당연한 교양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드러나는, 교훈을 준다기보다는 볼거리가 많은 장면을 선사하는 그림, 스케일과 기술적인 면들이 결합한 구경거리로서의 그림을 희구했다는 점 말이다. 그림이 가볍다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좋은 감상품'이어도 괜찮다는 기분. 이런 그림은 일종의 블록버스터 영화 같은 느낌으로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 익숙한 즐거움에 반하는 새로운 예술가들에 초반 반발했던 대중들의 정서도 이해가 된다.
예술품이 반드시 고귀한 정신을 포함하고 깊은 해석을 요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로마인의 타락』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