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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히티의 여인들
- 새로움을 향한 도전
- 원시주의의 꿈
타히티의 여인들
후기인상주의자, 색채의 대가, 열대로 떠난 모험가 등, 이번 그림의 주인공은 수식어가 많은 19세기 프랑스 화가 폴 고갱이다. 고갱의 작품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가 타히티에 살았다는, 그로써 원시의 힘에 매료되었다는 일화는 아는 사람이 많을 듯하다. 오늘 소개하는 그림은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 주인공의 모델이기도 했던 프랑스 화가 고갱의 작품 「타히티의 여인들」이다.
똑같이 타히티 여성 둘이 등장하는 <언제 결혼하니?>라는 그림이 2015년 카타르에 2억 달러가 넘는 가격으로 팔린 것을 생각하면, '이 그림은 가격이 얼마나 할까?'라는 속물적인 궁금증이 먼저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림의 주인이 살아 있다면 자신의 작품이 이 정도의 값을 받는 현실을 믿지 못할 것이다.
원래 폴 고갱은 파리의 증권 거래소에서 일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면의 열정은 점점 취미를 직업으로 삼아 예술에 전념하겠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만든다. 세상 일 이 항상 그렇듯 화가가 되고 말겠다는 의지가 단단했다고 하지만, 그림을 배우는 것도 화가로서 자신을 입증하는 것도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일단 데뷔가 많이 늦었던 고갱은 처음에는 동료들의 명성에 편승하려는 마음을 먹었고, 자신이 어울릴 범주로 인상파 화가들의 그룹을 선택해 함께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저금은 바닥이 났고, 프로 화가가 되기엔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이런 사정 속에 고갱은 대도시 파리 생활에 회의를 느낀다.
새로움을 향한 도전
새로움을 향한 도전이 이렇게 턱밑까지 쫓아온 실패를 극복할 유일한 길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그렇게 시작된 폴 고갱 평생의 방랑은 자신만의 예술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을 무모하고 감정적인 것으로 보이게 한다. 도시가 싫다며 원시를 향해 떠난 장소마다 이미 문명의 폐해가 넘쳐났다는 것, 그래서 그때마다 실망을 표현하곤 다시 다른 장소를 찾아갔다는 일화들 모두가 고갱의 이 무한도전을 왜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프랑스 내의 오지에 해당하는 브르타뉴의 작은 마을 퐁타방으로, 그 뒤에는 아예 프랑스 생활을 접고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로 미련 없이 이주한 고갱. 그는 도대체 뭘 쫓았던 걸까?
폴 고갱이 처음 남태평양의 섬 타히티에 가 살아본 것이 1891 년부터 1893년까지인데, 경제적인 어려움에 허덕이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유럽인들의 지독한 금전 집착과 결별하고픈 강한 욕망을 드러낸 적 있다. 타히티로 향하기 전에 남긴 글은 마치 선언처럼 보인다.
타히티에 가면 나를 신비롭게 둘러싼 원시적인 존재들과 나 자신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심장에서 들리는 아름답고 낮은 읊조림을 들을 수 있겠지. 그렇게 나는 열대를 조국으로 생각하는 새롭고 위대한 르네상스를 이루고야 말겠어.
글로 짐작하건대 고갱은 타히티의 실재 사정을 전혀 모르고 혼자만의 꿈의 제국을 향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타히티 섬은 이미 유럽에서 온 상인들과 술집 주인들의 땅이었다. 원주민들은 관광 산업과 연관을 맺거나 유흥업소 직원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때가 묻은 모습에 고갱은 초기에 말도 못 하게 실망하는데, 그래도 애써 조금이나마 상상했던 광경이 남아 있는 곳에서 원주민들의 이야기들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
『타히티의 여인들』은 이상향을 찾으려는, 그리고 신비로움 을 표현하고 싶다는 그의 목적에 맞게 두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원시에 대한 동경이 상당 부분 깨졌다는 것, 그리고 무척 실망했다는 사실도 비친다. 애써 외면하고 있기에 직접적이진 않지만, 그 실망은 눈에 띄지 않게 포함된 몇 가지 요소에서 배어 나온다. 결론적으로 고갱은 자기가 만나는 모든 장소마다 자기가 찾고 싶었던 순수한 힘, 자연과의 교감 등을 발견하는 데 실패하고, 스스로 상상을 더해 좀 더 원시적인 우주를 그림으로 창조했다고 볼 수 있다.
원시주의의 꿈
두 주인공은 옷을 다르게 입어 가면서 두 작품에 같은 포즈를 취해 모델이 되어 줬다. 왼쪽은 '파레오라고 부르는 타히티 여성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데, 야자나무 잎사귀를 돌돌 말면서 다른 곳을 쳐다보는 오른쪽 여성의 옷은 선교사들이 새로 보급해 준 옷이다. 고갱은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었고, 색채감과 표현 영역이 풍부한 예술가였다. 굳이 파리를 떠나 타히티 같은 곳을 찾아 나선 이유는 자신이 상상하던 원시주의의 꿈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인간의 손을 안 탄 자연 그대로의 생기와 순수 같은 것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고개와 같은 유럽인들의 손에 파괴되어 버린 후였다.
고갱은 단순히 자신이 펼치고 싶은 예술의 재료가 없어졌다는 아쉬움만 생각했다. 자기 자신부터도 타히티에서는 지배자였는데, 아마도 그는 에너지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고갱은 자신의 모델들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두 사람은 몇 시간이라도 서로 대화 없이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종종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 눈 속에는 슬픔과 회한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이런 타히티 의 얼굴들에 고갱은 열광했고, 그것은 인물들의 배치가 상당히 견고하고 힘이 있다는 것과, 앵글을 앞으로 극단적으로 당기는 구도 잡기를 통해 배경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색깔을 강조하면서 인물 간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표현을 고갱은 이후 종종 "단순한 예술이면서 신비한 예술"이라고 후하게 자평하며 자신의 열대 아틀리에 프로그램을 꾸준히 이어 갔다.
이미 서구 휴양지화되어 있던 곳에서 화면을 앞으로 당겨서라도 남은 원시성을 찾아보려 한 고갱의 노력은 어쩌면 타히티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그가 꿈꾸던 그 어딘가의 세상을 위해 타히티가 분장을 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그것 또한 병들어 있던 유럽 인들의 오리엔탈리즘 중 하나였다는 것을 부정하긴 힘들다. 그가 만들어 낸 색채와 표현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