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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브의 앤
- 궁정화가
- 한스 홀바인
클레브의 앤
<클레브의 앤> Anne de Cleves을 처음 본 사람들은 누구나 "와! 너무 아름답다!“ 라고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다고 합니다. 고급스런 붉은 벨벳 소재와 노란 금장식으로 만든 고풍스런 드레스가 짙은 녹색 배경과 색의 대조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격식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입술을 꾹 닫고 시선을 약간 아래로 내린 도도한 표정과 단정한 외모, 가느다란 허리와 가지런히 모은 손의 포즈까지 외적인 수려함은 물론 내적인 아름다움까지 더해져 우아한 느낌도 듭니다.
그림 속 여인은 16세기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네 번째 아내인 클레브의 앤입니다. 헨리 8세는 여성 편력이 심했던 왕으로 결혼을 여첫 번이나 했습니다. 첫 번째 아내 캐서린은 이른 나이에 죽은 형의 아내로, 그의 뜻으로 결혼한 것이 아닌 데다 왕자를 낳지 못하면서 결국 이혼을 결심하죠. 하지만 당시 유럽의 나라들은 가톨릭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이혼은 불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에 등을 돌리고 영국 성공회의 초석을 놓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유럽 역사상 가장 난봉꾼이었던 왕으로 회자되기도 합니다.
그는 세번째 아내 제인 시모어가 아들을 낳고 출산 후유증으로 죽자 새로운 여인을 찾습니다. 그때 그의 충신이었던 토머스 크롬웰의 주선으로 플랑드르 지역 클레브 공국의 공주 앤과 결혼합니다.
궁정화가
결혼전 그녀의 모습이 너무 궁금했던 헨리 8세는 자신의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1497-1543을 보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오게 했습니다. 궁정에 속해 일정의 보수를 받고 일한 궁정화가들은 당대에 가장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로, 왕은 그들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눈부신 업적을 남기거나 정치에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또 다른 역할 중 하나가 중매였습니다. 사진이 없던 당시에는 화가를 보내 초상화를 그려오게 해서 그 모습을 보고 결혼을 결정했던 것이죠.
초상화를 받아 든 헨리 8세는 그녀의 모습에 너무나 흡족해했습니다. 하지만 궁으로 들어오는 앤의 실제 모습을 보고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홀바인의 그림 속 모습과 실제 모습이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죠! 한마디로 화가는 이 결혼을 차질 없이 진행시키기 위해 그녀를 실제 모습과 다르게 너무나 매력적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헨리 8세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플랑드르의 야윈 말 Phardhile des Flandtes이라고 그녀를 조롱하고 멀리하면서 결국 6개월의 짧은 결혼 생활을 끝으로 이혼하고 다른 여인과 결혼합니다. 그녀는 이혼에 순순히 합의했고, 다행히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다른 왕비들과는 달리 헨리 8세의 친구로 남아 평온한 삶을 유지한 현명한 여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평생 반려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을 왜곡해서 그려 실망을 안긴 화가는 어떻게 됐을까요? 이 결혼을 주선한 토머스 크롬웰은 처형당했지만 다행히 홀바인은 궁정화가의 직위를 박탈당하는 수준으로 끝납니다. 더 이상 왕의 지시를 받으며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었지만 보수는 계속해서 받았다고 하니, 헨리 8세가 그를 얼마나 아끼고 좋아했는지 그리고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를 알 수 있습니다.
한스 홀바인
한스 홀바인은 16세기 초 스위스의 번화한 도시 바젤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홀바인은 그림에 대한 아버지의 열정을 물려받았고, 곧 그의 실력은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홀바인의 재능은 당시 가장 강력한 인물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1526년에 그는 영국으로 여행하여 헨리 8세의 궁정에서 환영을 받았습니다. 홀바인이 그의 가장 상징적인 작품 중 일부를 만들어 튜더 왕조와 그의 신하들을 일련의 숨 막히는 초상화로 불멸의 인물로 만든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홀바인의 초상화는 사실주의로 유명하며 피사체의 신체적 유사성뿐만 아니라 내면의 본질도 포착합니다. 날카로운 시선과 인상적인 존재감을 지닌 그의 유명한 헨리 8세 초상화는 튜더 왕조 시대의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왕족의 초상화 외에도 홀바인은 다른 예술적 추구도 합니다. 그는 책과 원고를 위한 복잡한 목판화 디자인을 제작하는 재능 있는 초안가였습니다. Thomas More의 "Utopia"에 대한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은 복잡한 디테일과 미묘한 재치 및 아이러니를 결합하여 이 장르의 걸작으로 간주됩니다.
영국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홀바인의 삶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격동적인 정치적, 종교적 환경은 그가 선택한 조국에 불확실성과 격변을 가져왔습니다. 1538년 홀바인은 바젤로 돌아와 1543년 45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할 때까지 화가이자 삽화가로 계속 일했습니다.
그의 초상화는 사실주의와 통찰력으로 계속해서 우리를 사로잡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매력적인 인물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